>1527593244> 특유의 귀차니시즘으로 하루 300단어로 소설 써보는 스레 (17)
웨이로
2018. 5. 29. 오후 8:27:14 - 2018. 6. 19. 오후 8: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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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웨이로 (3310914E+5) 2018. 5. 29. 오후 8:27:14이미 단체에서 한 차례 쓴 적이 있고 현재도 단체로 쓰고 있는 소설입니다만.
고립되어서 쓰다보니 진척이 별로 안 돼서 공개하면서 써보고 싶군요~
그럼 오늘 하루치 쓰고 갑니다~
그녀의 인생에 스트라이크
프롤로그
그녀의 이름은 홍예실, 나이는 열여덟 살로 외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 중 한 분이 소녀를 보살폈고
소녀는 부모님으로부터 꿈과 희망을 얻었습니다.
사건은 그녀가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부모님과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벌어졌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무사히 도착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부모님이 오랜 시간 비행기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던 탓이었을까요.
오랜만에 비서가 하는 운전이 아닌 아버지가 직접 차를 몰면서 일어난 일이었을까요.
교통사고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구급차가 서둘러 그들을 근처 병원으로 이송하였지만
아버지는 후송 도중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한동안 수술을 받으시다가
완쾌한 딸을 보고 “살아줘서 다행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병원을 퇴원한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은 참 맑은 날이다가도 순식간에 어두워져서는 우울하다.
그래서 아예 집 안에서 나오지 않기로 하고 집 천장을 푸른 페인트로 칠해놓고는 웃어버렸다.
이제 우울한 날은 없다. 상식적으로도 이젠 천장만 바라보면 맑은 하늘이라고 믿을 수 있게 된 거다.
덕분에 집 안에서 무언가를 하든지 간에 매우 기분이 좋을 터였다.
“이제부터 영원히 집 안에 있을 거야.”
책을 사고 식료품을 사고 어쩌다 연락이 오는 친구들을 부르면서도 어떻게든 삶을 이어간다.
정말 많은 시간이 흘렀던 것 같았다. 오늘도 하늘은 푸르구나. 지치지도 않고 삶은 활기찼다.
삶이 활기차면 사람은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것저것 일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 찼다.
그래서 각 분야의 선생님들을 불러서 어느 것이든 배우고 배운 것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어라, 이건 또 좋은 그림이네.”
가장 즐거운 것은 그림 그리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쓰잘머리 없는 사물들을 그렸었다.
키보드, 높이 쌓인 세탁물들, 빈 콜라 캔, 그리고 한 입 배어 물은 초코파이였었지.
다행이도 이런 지루한 사물들을 그리는 것에서 실력이 늘었던 탓에 풍경을 그릴 수 있었다. 상상하고 싶은 환경이 있었고 믿고 싶은 세상이 있어서 꾸밈없이 제대로 그렸다.
“하지만 안타깝네. 뭔가 부족해.”
한 번 재미가 붙고 실력도 생기자 집 안 온갖 곳들에 벽화를 그려 넣었다.
처음에는 막무가내로 그리기 시작했는데 곧 집 안의 벽들은 기괴한 형상만을 드러냈다.
이 변화를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는지 미술 선생님은 벽화는 회화와 다르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시간은 남아돌았기에 벽화를 그리는 법을 물어보았다.
“세상에, 믿을 수가 없네.”
그 선생님은 벽화를 그리는 법을 몰랐다. 따라서 나는 벽화를 그릴 줄 아는 선생님을 구했다.
처음에는 혼자서 벽화를 그렸다. 그런데 그려도 또 그려도 벽화가 완성될 기미가 없었다.
이 작업을 보다 못한 선생님이 조수들을 고용할 것을 권유하자 결국 고용하기로 했다.
내 집에 아무도 들이기 싫어서 사람들을 고용하지 않았던 것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
1 웨이로 (0148502E+5) 2018. 5. 30. 오후 8:18:57“자자, 실력 있는 조수 분들은 어서 오세요!”
후, 이제 벽화를 그릴 수 있겠지?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기대되어서 무척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이게 바로 그녀의 관점으로 설명한 그녀의 이야기가 될 터였다.
정말이지, 앞으로 등장할 주인공과의 관계가 기대되는 마음 설레는 이야기 이었을 텐데...
앞으로의 행보를 전혀 예측할 수도 없는 이 순간에 뜻밖에 일이 일어난 거다.
“누구세요?”
아아, 잡혀버렸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군요.
제 1장
본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레이터가 잡혀버리다니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다.
그동안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수많은 내레이터가 등장했었지만 어느 누구도 내레이터가 잡혀버린 적이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 내레이터는 교육 기관에서 특별히 만들어지는 존재이고 특별한 교육을 받는 사람들이다.
상상해봐라! 어째서 내레이터는 아무도 듣지 못한 이야기를 아무도 모르지만 자신만 알고 있는 체로 이야기를 남겼겠느냔 말이다.
성경에서 나오는 속삭임, 역사서에서 나오는 수많은 짐작들, 그리고 갖은 이야기 속에서 나오는 제 3자 격인 설명들은 모두 내레이터가 설명한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은 특별한 능력이 있지 않는 이상 전혀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는 거니까. 결국에는 내레이터가 교육을 받았고 전문적으로 가르침을 받았다는 증명이다.
“그러니까, 나는…”
“누구인지는 상관없고 왜 제 저택에 함부로 들어오신 거죠?”
그런데 지금 잡혀버리고 말았다. 창세기부터 시작한, 아니 혹은 우주의 시작부터 계속되었던 내레이터의 잡히지 않는 완전무결한 존재라는 자존심을 처음으로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 결과로 예실의 기분은 지금 상당히 격양되어 있다. 그녀의 저택에 침범한 그럴싸한 이유 따위 생각할 수도 없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이유가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 말 안 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답답한 것을 싫어하는 상당히 자유분방한 사람이다.
따라서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것은 불에 기름을 쏟아 붓는 격이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표정 굳어서 아무 말도 못하는 거예요? 묵비권 같은 같잖은 권리라도 주장할 셈인가...경찰이라도 불러서 콩밥 먹여야 정신 차릴 모양이네. 사적으로 이것저것 물어보면 귀찮아서 가급적이면 부르지 않고 해결하죠.”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가는 거와는 달리 그녀는 매우 화가 나는지 얼굴에 홍기마저 어리고 있었다.
이건 아무래도 그녀가 겪은 사고가 원인이리라. 그와는 별개로 확실히 지금 경찰에 잡혀간다면 입장이 난처해진다.
내레이터로서 이야기를 진행시키지 않으면 더 이상의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수많은 내레이터들에게 불명예를 끼치는 일이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어야 하는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점수를 따야 할 사유가 생긴 셈이다
“그럼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전 돌아가신 부모님의 지인이고...”
“함부로 저택에 침입한 사람에게 들을 말은 아니군요.”
“윽...”
이건 정곡이다. 도둑이 단지 자기 물건을 찾으러 왔을 뿐이라고 하는 거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솔직하게 털어 놓으면 봐줄게요.” -
2 웨이로 (6505192E+5) 2018. 5. 31. 오후 8:24:37자자, 침착하게 생각해보자. 솔직하게라는 대목에서 할 만한 말은 무엇이 있을까.
상대방은 사고로 큰 악재를 맞이했던 사람, 집안을 침입한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게 될지는 뻔하지 않는가.
사람이 한 번 개에게 물리면 개에게 두려움을 갖듯이 불행이 찾아왔던 사람에게 갑작스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건 악재로 여겨질 터.
“네, 전 도둑입니다. 이 저택이 굉장히 커서 뭔가 훔칠 수 있는 물건이 많아 보여 들어왔습니다.”
그렇다면 이렇듯 뻔한 대답이 오히려 효과적일 수 있다. 순간 내레이터는 그녀가 한참동안 자신을 바라보며 뭔가 재미있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왠지 귀찮은 일에 관련된 듯한 느낌이 들자, 내레이터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제발 선처를...”
“그럼 제게 고용되도록 하세요!”
불안한 직감은 순간적인 기지로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제 2장
내레이터는 망연자실한 체 예실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레이터 인생 처음으로 이야기 속 주인공에게 이끌려 방으로 끌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손을 뿌리치고 달아나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끝났다는 체념이 넘쳐흘렀다. 게다가 지금 달아나도 어쩐단 말인가.
“잠시만 기다려줘요.”
내레이터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실은 잠시 실례를 구하고는 능숙하게 방 한복판 책상 위에 올려 있는 노트북을 열고 전원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내레이터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순간의 여유가 그로 하여금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내레이터로서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주인공을 둘러싼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내레이터는 주인공이 아니고 조연도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주십시오.
내레이터는 단지 관찰자입니다. 내레이터가 이야기에 개입하는 순간, 그 존재감을 잃는 겁니다.”
그토록 강조하던 내레이터의 임무는 가장 먼저 떠오른 것들 중 하나였다.
사실 내레이터는 동기들보다도 더 자신의 가치에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오죽하면 그의 동료들은 고작 이야기를 기록하는 행위에 너무 집착한다는 말까지 했을 정도였다.
“아냐, 그렇지 않아. 이뤄야 할 의무도 없는 나는 상상도 못하겠는걸.”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내레이터는 이렇게 대답할 따름이었다.
또 내레이터는, 가치 없고 이뤄야 할 목적이 없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다. 아니, 받아들일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그럼 동료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지. “내 존재감이 옅어지는 것 같지 않냐.” “마지막 수업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냐.
“그래, 어쩌면 이게 가장 편히 사는 것일지 몰라.” 같은 말들 말이다.
“아, 미안해요. 노트북이 많이 느리네요. 한 번쯤은 껐다 켜줘야 했나 봐요.”
그녀는 방금 전만 해도 도둑이라 자백한 사람에게 환하게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말을 꺼냈다.
단순한 말이었지만 내레이터는 이 말로 인해 정신을 꽤 차릴 수 있게 되었다. 일단, 쓸모없는 과거회상을 그치고 우선 방 안을 둘러보았다. -
3 웨이로 (7033911E+5) 2018. 6. 1. 오후 8:29:54방 안에는 바깥 거실과는 달리 벽화는 오직 책상 왼쪽 담장, 즉 방문 바로 왼쪽 담장에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담장에는 네모난 책꽂이 사이로 수많은 책들이 꽂혀있었다. 그 밖에 사소한 거로는 그녀 책상 위에 있는 미술 관련 책과 붓, 물감, 물통, 그리고 키친 타워가 돋보였다.
“항상 뭔가를 그리시나 봅니다.”
“그런 셈이죠. 후훗, 저기 그려져 있는 그림은 이 방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고요.”
그녀가 가리킨 그림은 방문 뒤에 매달려 있는 커다란 기린 그림액자였다.
화창한 날씨를 상징하는 푸른 구름과 아프리카 풍으로 그려진 세밀하면서도 얼룩진 어린애 같은 그림이었다. 내레이터는 이미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 밖에 수많은 책들도 눈에 뛰는 군요.”
“가끔 책을 읽어요.”
“이상하게 동화책이 많이 보입니다만…”
“아, 그건…뭔가를 그리고 싶을 때 참고를 하는 용도로 쓰여요.”
글쎄, 어떨까. 그녀는 내레이터가 물끄러미 쳐다보자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남에게 말해주기는 조금 부끄러운 것 같았다. 실제로 동심이 담겨 있는 이야기니 부끄럽게 느껴질 만도 하다.
왠지 흥이 돋아난다. 평소라면 그렇지 않겠지만, 조금 전의 만남이 영 아니었다고 할까.
아주 약간 골려주고 싶어져 치기 어린 내레이터가 빈정거렸다.
“한 번 살펴봐도 괜찮겠습니까.”
“아, 네? 네네, 봐도 되요.”
예상치 못했던 일인가 보다. 그 침착했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약간 허둥거리는 아마추어 같은 귀여움이 묻어난다.
최대한 노트북에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만 철두철미한 성격이지만 한 번 어긋나는 사건에는 약한 성격이었지.
내레이터는 문득 자신이 생전에 키우던 푸들 한 마리를 회상했다.
그 녀석, 기쁜 일이 있거나 조마조마한 상황이 되면 꼬리를 꽤나 흔들었었다. 같은 맥락이다.
자, 어디 보자...저 그림은 이 책에서 본 따 그린 것일거다.
“어라, 이 동화책에 그려진 기린과 매우 유사하네요.”
“우으, 네...”
“그리고 호오, 아버지가 서장에 글을 남겨 주셨네요. 읽어 보겠습니다.”
“아, 하, 함부로 보지 마세요!”
당황했는지, 귀가 굉장히 빨갛게 변해있지만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아무래도 끌려다니기만 하는 건 지겹지 않은가.
“다음에 갈 때는 기린에 올라타려고 담장 뛰어넘을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 행동은 동화로만 상상합시다.”
“으, 어, 어릴 때만 그런 생각한 거라고요.”
물론, 그럴 리는 없다. 바로 다음 줄에 그렇지 않다는 게 증명되었으니 말이다.
"추신: 3년 후에도 똑같은 일을 시도하다니 조금 철이 들어줬으면 좋겠네요."
"주, 주세요! 당장!"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를 보자 내레이터는 잠시나마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어설픈 손짓으로는 쉽게 뺏을 수 없는 책을 일부로 가져가게 내버려두었다.
본래대로라면 주인공 씨와 일어나야 하는 재밌는 이벤트일 텐데 말이다. 미안합니다, 집주인아씨.
“다 썼네요. 자, 살펴보세요.”
그녀는 내레이터에게 보였던 귀여움도 뒤로 하고 노트북으로 쓴 계약서를 보여주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4 웨이로 (0245648E+5) 2018. 6. 2. 오후 7:44:25근로자 성명 ------- 은 홍예실 씨를 고용주로 한 고용계약서에 동의합니다.
1) 근로자는 직접 운전을 하지 않습니다.
2) 근로자는 고용주와 친구 사이가 됩니다.
3) 근로자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4) 고용주 혹은 근로자가 계약을 남에게 알리는 즉시 파기됩니다.
5) 고용주는 근로자와 언제나 원할 때에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6) 성적인 접촉 및 재산을 갈취하는 것은 엄연히 불법이고 엄금합니다.
7) 어떤 경우에도 고용주는 근로자에게 추가 수당을 지급할 의무가 없습니다.
8) 고용주가 원할 때에는 엄연히 근로자로서 존댓말을 씁니다.
9) 고용주는 숙식을 근로자에게 제공합니다.
임금은 월 2,000,000원. 계약 만료 기간은 해고를 통보하는 그 날까지입니다.
서명 --------
“그러니까, 그게, 이 근로 조건들은 뭐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요. 이제 곧 아시게 될 거에요.”
내레이터의 횡설수설에 그녀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본래 주인공에게 주어져야 하는 계약서가 아닌가. 내레이터는 한참을 보고 망설였다. 그러자 그녀는 내레이터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을 건넸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요. 무슨 무시무시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니...”
“그렇습니까...”
내가 주인공이 되는 건가, 내레이터는 장고에 빠졌다.
과거에 자신이 아는 어떤 내레이터가 즉흥 공연에 관해서 말한 적이 있었다.
일반 관중이 공연에 참여해서 극중 이야기가 종종 달라지는 경우가 흔하다는 거다.
다시 한 번 돌아보면 내레이터는 이미 모습을 들킨 상태부터 어긋난 존재다.
결국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하든 완전히 무관한 존재가 이야기에 연결되어 버린다.
결국은 1인칭, 2인칭, 3인칭 등 어떻게 풀어가든 캐릭터의 윤곽이 드러나게 된다.
내레이터가 남자라는 것. 어떻게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지도 기록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왕 극중 참여 같은 형태가 되었다면 물러날 수 없이 이야기를 진행해야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주인공과 이어줄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한참을 망설이며 고개를 기웃거리던 내레이터는 조연으로 참여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최악은 면해야 한다. 안주거리 마냥 어떤 내레이터가 여자 캐릭터를 보고 주인공 자리를 그만~같은 소리를 들을 순 없으니 말이다.
“여기는 외곽인데 식료품 조달은 어떻게 하시나요? 자주 가야 하는 겁니까?”
“한 번에 많이 사놓고 있어요. 식료품을 옮기고 보관하는 게 조금 힘들 거예요. 아, 무슨 인도처럼 자물 냉장고가 아니니 원하시는 데로 드셔도 좋습니다.”
“혹여나 정원 관리 같은 건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건 제가 항상 신경 썼지만...이제부터 그 일도 봐주시면 좋겠네요. 그다지 어렵지는 않을 거예요. 가볍게 정원 한 바퀴 돈다고 생각하면 되실 겁니다.”
그녀는 이제 편안해졌다는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사실 그녀가 말하는 잡다한 일은 사실 굉장히 번거로웠다. 그녀가 살고 있는 곳은 도심 주변이었고 시골에 속했다. 따라서 차를 타고 나가도 웬만한 마트로 가기까지는 거의 30분이 걸렸다...이건 그녀의 트라우마가 반영된 지리적 위치였다. 교통사고 이후로, 그녀는 가족의 전 재산을 팔고 시골로 내려갔다. 옛날 할아버지가 살고 계시던 별장 같은 집에서 그녀는 틀어박힌 체 나오지 않았다. 영원히 죽은 사람처럼, 완전히 세상에서 살 의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그녀는 마치 자신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흔적을 깔끔하게 지워버리려는 듯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죽어 있었던 것이다. -
5 웨이로 (2047258E+5) 2018. 6. 3. 오후 6:54:32그녀가 내레이터에게 계약을 제안하는 건 상당히 이례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겠다.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르겠는 이방인을 고용하는 상황은 의아하기도 하다. 내레이터는 물었다.
“왜 저를 고용하시고 싶어 하는 겁니까?”
“그건 비밀이에요. 영업 비밀.”
아리송하게 묻는 질문에 뚱딴지 같이 대답한다. 묘하다.
내레이터는 처음으로 예실에게 관심을 가지고 흥미를 느꼈다.
이제까지 평면적인 캐릭터라고만 느낀 그녀가 이토록 난센스로 다가오자 입체적인 인물로 여겨진 탓이었다.
“일은 언제부터 하는 거지요?”
“음, 오늘은 그른 것 같고 내일부터네요.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 같긴 하지만 집 구경도 시켜드려야 일의 윤곽을 파악하시겠죠.”
이를 테면 어긋나는 행동과 현실 감각에도 불구하고 사실에 빗되어 속을 능글능글하게 드러내는 언변이 돋보인다.
“그렇다면 굳이 저를 고용하실 필요도, 제가 받아들일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글쎄요, 우선 제게는 벽화를 같이 그려줄 조수가 필요해요. 하지만 벽화 조수는 내일이면 오니 이미 해결된 문제죠. 그렇게 되니 관리나 식료품 조달 같은 잡일을 처리할 사람이 필요하게 됐어요.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 당신을 고용하려는 거고요. 당신이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를 대보라면, 간단히 말해드리죠. 이곳에서 불법 침입 및 절도죄로 불구속 입건이 되고 싶지 않다면 제 제안을 따르세요. 고소 취하는 물론, 일자리도 얻으실 수 있으실 테니까요.”
거기다 논리적인 연결을 강변으로 이어주는 기민함도 보여준다. 이정도면 반 협박이지만 말이다. 내레이터는 입술을 살포시 물었다. 슬며시 미소가 새겨져 입술을 깨물지 않고는 도저히 감정 변화를 숨길 수 없어 보였다. 위험하다. 몸이 떨려 흥분이 가시질 않는다.
“결국 승낙하라는 말씀이시군요. 참 노골적이시군요.”
“네, 제가 원래 유학파라 직설적이고 담백한 대답을 선호해서요.”
뿐만 아니라 가시 돋친 소리를 해도 전혀 기가 죽질 않는다.
내레이터는 속으로 감탄했다.
“그럼 좋습니다. 계약서에 서명하도록 하죠.”
“빨라서 좋네요. 잘 부탁드려요.”
끝으로 깔끔한 멘트까지 이어진다. 내레이터는 시간을 끌며 생각해낸 이름을 적었다.
“그러고 보니 통성명을 안했었군요. 제 이름은 홍예실, 나이는 20살입니다. 다시 한 번 잘 부탁드려요, 나지만 님.”
“4대 보험까지 해주신다면 언제든지.”
“안타깝지만 4대 보험까지는 안할 거예요.”
“블랙 기업의 악덕 업주시네요.”
“잘 어울리죠?”
내레이터는, 나지만은 나직하게 웃어주었다. 뭐, 어때. 어차피 1회용 캐릭터일 뿐이다. 그렇게 그는 가볍게 조연으로서의 다짐을 새겼다.
제 3장
“좋아요, 좋아. 이제 집을 한 번 둘러보자고요.”
“놔주세요. 어디 도망 안 갑니다.”
예실은 그를 끌다시피 이끌어 방에서 나왔다. 의외로 작은 몸집에 비해서 악력이 죽여주었기에 바지가 쥐어진 지만은 슬슬 끌리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부끄러웠는지 그는 어떻게든 손을 뿌리치게 만들려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설득했다. 다만 이 아가씨, 어쩐지 마이페이스가 강해서 도저히 손아귀에서 힘을 빼려고 하질 않았다. -
6 웨이로 (559713E+56) 2018. 6. 4. 오후 7:56:10“갑자기 보험 이야기를 하셔서 불안하단 말이죠.”
“유학생 맞춤 블랙 조크였는데 진심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세 가지 소리들 중 하나가 보험 관련된 말이라고요?”
“참나, 모르겠는 분입니다.”
엄청 들떴다. 목소리가 하이 톤이라 쉽게 티가 났다.
그래서인지 겉으로 보기엔 평범하게 예쁜 20살 여자 대학생 같다.
방금 전에 보았던 날카롭고 영악한 면모는 어디가고 쾌활해 보이는 여자가 있다.
지만은 전체적으로 넓고 반짝반짝 빛나는 집과 더불어 예실의 미소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뭘 그리 멍하니 보고만 있어요? 잘 따라와요.”
“네네.”
그러나 갑자기 시니컬하게 쏘아붙이는 그녀를 보고 이내 지만은 자신이 망상에 빠져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상상에 빠지기보다 어떻게든 손을 놓게 하려고 애써 긍정하며 보조를 맞춰 걷기 시작했다.
“자, 본격적으로 원 포인트 레슨마냥 설명해 드릴게요. 방금 나온 방은 저의 작업실 중 하나에요. 제 침실이 아닙니다. 저거와 같은 작업실은 두 군데 더 있고 자주 더러워질 예정이에요. 아무래도 조수들과 같이 계속 예술에 매진하려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테죠.”
“그럼 청소를 매일 해야 한다는 겁니까?”
“꼭 그럴 필요는 없어요. 열심히 작품을 만들다보면 미술 도구들을 어지럽게 놓아 둘 텐데 함부로 청소를 해버리면 영감도 끊기고 혼란스러워지니까요. 그저 거실이 자주 더러워질 수 있어서 계속 청소해야 할 거에요. 작업실 청소는 부탁드릴 때만 해주시면 되고요.”
“결론은 청소를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는 말이군요.”
“그렇게 되네요.”
예실은 고귀한 귀족이 불쌍한 민중을 조소하듯 풋, 하고 웃었다. 지만은 어린 아이를 보는 것 같아 약이 올랐다.
“에헴, 그래도 세 군데 모두 사용하는 일은 드물 거예요. 주목적은 어디까지나 제 그림 실력 향상과 예술 활동 심취에 있어요. 나머지 두 곳의 벽화가 상당히 진척된 다음이 아닌 이상, 세 군데를 모두 사용하는 일은 없을 테죠.”
“그렇군요.”
“말이 또 길어졌네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주방이 있고 그대로 가로질러 가면 바로 정원이 보여요. 원래 펜스는 없었지만 정갈하게 네모난 모양으로 만들어놨죠. 지나치지 않고 왼쪽으로 가면 본래 할아버지가 쓰시던 안방. 오른쪽으로 가면 화장실이 있습니다. 그럼 2층으로 가보죠.”
그녀의 눈이 번들거렸다. 감상에 젖어 촉촉해진 눈빛이었다. 지만은 그 눈동자 사이로 텅 빈 정원을 볼 수 있었다. 펜스가 쳐져 있는 정원은 외롭기 그지없다.
“저는 2층을 주로 써요. 사실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어떻게 써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답니다. 원체 먼지가 쌓여 있고 쥐가 도사리고 있어서 폐허나 다름없었으니까요.”
“정말로 나무가 약간씩 파 먹혀 있는 게 보이는 군요.”
“하아, 문제 많았어요. 우선 청소기로 쓱, 청소를 해준 다음에 고양이를 풀어야만 했죠. 그런데도 이따금씩 쥐 한 마리가 발견되곤 하는 거예요. 아무래도 구멍이 뚫려 있나 보았더니 큼직한 구멍이 하나도 아니고 네 곳이나 뚫려 있더군요.” -
7 웨이로 (6274966E+5) 2018. 6. 5. 오후 7:32:00대부분의 내레이터들이 잘 알게 되는 시골 별장의 문제점이다. 친환경적이다. 낭만적이다. 친근감 있다. 그런 묘사들은 막상 시골에 와보면 산산이 부서지기 십상이다.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막연한 이상을 꿈꾼다면 현실적인 장애물이 있다는 것이다. 내레이터들이 소개한 이야기 중 하나에는 막연한 귀농으로 재산을 잃고 도심에서 극빈자로 살아가는 남자의 구구한 사연도 있다.
“그뿐 아니라 둘러보니까 확연히 개선점들이 보이더라고요. 천장에 피어난 곰팡이와 한쪽 구석에 존재하는 새집과 벌집, 숨어있는 뱀 등이 그러했죠. 힘들었어요. 혼자만의 공간을 스스로 만든다는 기분에 자신감을 느끼기도 했지만요.”
“뭔가 혼자 다 하셨다는 뉘앙스로 들립니다만…”
“어머, 당연히 혼자 다 했다고요? 그러니 투정이죠. 자랑도 포함되어 있지만요.”
“할 말을 잃게 만드십니다.”
…전부 즐기는 행위로 간주한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로 탈바꿈하지만 말이다. 흔히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괴짜로 불리는 건 이런 정신적 사상 덕분이겠다. 개의치 않고 그녀가 걷자, 지만도 따라 걸었다.
“아무튼 2층에는 1층과 마찬가지로 화장실이 하나 있고 침실이 하나, 창고 하나, 서제 하나, 게임기를 모아놓고 게임을 하는 방이 하나 있어요. 개인적으로 서제를 만화방, 게임방을 플레이 룸으로 부르고 있고요.”
그녀는 장황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러고는 곳곳을 들려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대략적으로 각 방의 지리적 위치를 표현해보면 이렇다. 계단을 따라 나오면 왼쪽에 방이 하나 있고 막혀 있는데 거기는 창고다. 오른쪽으로 가서 곧장 가로질러 가면 침실이 있으며 원룸처럼 화장실도 같이 딸려 있다. (예실은 침실과 화장실만은 본인의 사생활 보호라는 명목으로 말로만 설명해주었다. 따라서 자세한 가구는 모른다.) 가던 와중, 왼쪽에 있는 방은 만화방이고 오른쪽에 있는 방은 플레이 룸이다. 만화방은 그 명칭에 어울리게 신구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장르의 만화가 나열되어 있었다. 만화 카페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모두를 수용하는 폭넓고 방대한 만화들이 있었다. 플레이 룸은 그와 반대로 클레식한 닌텐도 64 기기와 플레이스테이션 4 프로가 있었다. 만화방과 비교하면 한없이 간소하고 취향이 확실히 갈렸다. 심증이 있던 지만이 슬금슬금 눈짓을 보내자 예실이 대답했다.
“닌텐도는 옛날 클레식한 게임 플레이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렇지 않게 최근 닌텐도 회사의 입장에게는 난처한 말을 꺼냈다. 이런 딱한 레트로 적인 성향이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흡사 속편이 나오길 바라지만 이야기 풀이 방식이 바뀌질 않길 원하는 올드팬 같지 않은가.
“치,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네요. 어쨌거나 대부분 설명해 준 것 같아요. 말씀드린 데로 창고는 청소하지 마시고 열어보지도 마세요. 침실도 화장실도 금지. 만화방이나 플레이 룸은 마음대로 사용하시고 청소하셔도 되세요. 아, 제가 언급했던 데로 만화방은 항상 벽 틈에서 물이 새지 않는지 주시해주세요. 플레이 룸은 전에 구멍이 생긴 데니까 어딘가 갉아 먹혀져 있진 않는지 봐주시면 되고요. 그 밖으로는 화분에 관한 건데, 만화방의 화분 두 개는 일주일 후에 물을 주시면 되세요. 플레이 룸은 아침에 물을 이미 주었으니까 이 주 후에 주시면 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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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웨이로 (7401289E+5) 2018. 6. 6. 오후 6:42:42아무튼 주의사항이 무척 길기도 하다. 덕분에 지만은 머리가 박살날 것 같았다.
적응하기 위한 교육은 그에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절로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길었죠? 시간이 어디, 27분 정도 지났군요. 조금 살이 찌기 쉬운 사치 같지만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을까요? 지루하실 만도 하니까요. 저도 당분이 고프네요.”
“언제든지 좋습니다.”
그렇게 말한 그녀는 1층의 주방이 아닌 침실로 향하더니 작은 원형 딸기 맛 하겐다즈를 두 개 가져왔다.
비닐로 덮인 플라스틱 수저가 지민의 눈에 띄었다.
“작은 냉장고가 하나 있는 모양입니다. 플라스틱 수저도 구비하신 걸 보면 아이스크림을 수시로 조달하시는 것 같고요.”
“후훗, 달달한 건 생필품이죠. 특히 여자들은 그래요.”
“배달시키는 겁니까?”
“눈썰미가 좋은 추리가 마음에 들었는데 기억력은 금붕어 같으시네요. 배달은 안 해요. 한 번에 많이 사놓는다고 하지 않았나요? 다 직접 갔다 오는 거예요. 앞으로 잘 부탁 드려요. 자주 시킬 테니까요.”
상큼하고 달달한 딸기 맛에 푹 빠져있던 지만에게 난데없이 쓴 독설에 심한 떠넘기기다.
그는 예설이 당근과 채찍을 참 잘 병행한다고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더 이상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으므로 뭐라도 말하기로 했다.
그는 어디까지나 내레이터다. 플롯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는 거다. 티스푼으로 맛있게 음미하고 있는 예실에게 지만은 먼저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만화방이나 플레이 룸을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부럽습니다.”
“헤에, 그, 그래요? 언제든지 이용하셔도 무방해요! 물론 일이 없을 때요.”
의외로 솔직하게 기뻐하는 예실이다. 발그레 붉어진 귀가 귀여웠다.
더불어 수줍은 미소가 예쁜 보조개를 만들어 하얀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지만은 마음이 통했지만 생각대로 말을 이어가기로 했다. 당한 건 돌려주고 싶었다.
“특히 플레이 룸. 취향이 확고하신 게 제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표정은 전혀 아니었던 것 같은 데 말이죠.”
“아닙니다. 뜻밖이라서 당황했을 뿐입니다.”
당연히 아니다. 적당히 입 발린 말을 담은 거다.
예실은 아직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이스크림에 정신이 팔렸다.
지만은 계획대로 되고 있어서 적잖이 통쾌했다. 그녀가 슬슬 덫에 걸려들고 있었다.
“닌텐도 64는 직접 구입하신 겁니까? 상태가 꽤 양호해 보이더군요.”
“아뇨, 아버지가 사주신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가 원래부터 가지고 노시던 물건이죠.”
“무례가 될 지도 모르지만 똑바로 한 가지는 말씀 드리겠습니다. 거짓말은 하면 안 됩니다.”
확실하게 미끼를 물었다. 월척이다.
이제 완전히 고삐를 잡고 몰아간다. 손맛이 느껴지면 당겨야 한다.
대충 그럴 듯한 추리를 보여줄 시간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계속 사용하셨다는 말, 구시대의 게임기라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언뜻 납득하기 쉽습니다. 나이 차로 인한 시간대의 다름을 고려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닌텐도 64는 아버지가 오래 전부터 쓰시던 게 아니죠?”
“예?”
“오래토록 사용하셨던 물건이라면 분명 때가 묻어있어 겉이 지저분 할뿐만 아니라 색이 바래져 있어야 정상입니다. 스크래치도 여러 군데 발견 되어야 하죠.”
“관리를 잘하면 그런 흔적이 별로 없잖아요.”
“아버지만 사용하셨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아가씨, 예실님도 사용하시지 않습니까? 플레이 룸 소개 당시 게임팩들은 어지럽게 난잡해 있었습니다. 즉, 어렸을 때부터 예실님도 같이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조금 전에 말하셨죠. ‘닌텐도는 옛날 클레식한 게임 플레이가 좋다고 생각합니다.’라고. 그런 평가를 일찍이 내리고 최근 닌텐도 회사의 게임기기와 게임을 구입하지 않으셨다면 어렸을 적에 일찍이 게임을 접해보셨기 때문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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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웨이로 (7360599E+6) 2018. 6. 7. 오후 8:22:52한 가지 사실을 아시는가? 진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착각은 추억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실제로 있었던 일화로 미국에서 한 여자가 아버지를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케이스가 있다.
심리상담사와 상담하던 중, 자신이 10대였을 적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한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당연히 그를 계기로 가족은 풍비박살 나고 그녀와 같은 피해자가 우후죽순 목소리를 내서 고발, 그들의 부모를 고소했다.
놀라운 건 10년 후, 그 여자는 성추행 기억이 유도 상담 중에 만들어졌음을 스스로 깨달았다는 거다. 그녀는 심리상담사를 고소하고 가족의 화목을 꿈꾸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이와 같이 사람의 기억은 완벽하지 않다.
연결되는 이야기다. 지만이 말한 것 중 확실치 않은 건 예실의 아버지가 소유했던 게임기가 앞서 말했던 상태와 같을 것이냐는 의문이다.
원형을 보지 못한 이상, 섣부른 넘겨짚기라는 말씀이다. 지만과 같이 말할 경우, 상대방의 성격과 이해 방식에 다라 대응하는 상대방의 분류가 나뉘기 십상이다.
1번 부정, 2번 이해, 3번 판단이 각각의 분류라 할 수 있다. 1번이라면 대응하는 말이 참 간편하다. 새로 구입한 기기도 중고이므로 흠이 있을 수도 있다고 잡아 때면 그만이다. 그 경우에는 내레이터는 새로운 증거를 제시하면 그만이었다.
“그걸 어떻게…”
대개 소극적이고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들이 2번 부류에 들곤 한다.
…조건에는 전혀 맞지 않은 것 같지만 어쨌든 상대는 불의의 사고로 은둔해버린 사람이다. 정신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남의 말에 의존하는 경향이 생길 수도 있다.
“단순한 추리입니다. 작은 것에서부터 어투, 표정까지 모두 고려해서 결론을 내린 것이고요.”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했던 단서는 내레이터 기관의 스크립트였겠지만 말이다.
이와는 별개로 유심히 듣고 있던 그녀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금붕어 같은 기억력이라고 한 건 과소평가였군요. 맞아요. 엄청 망가뜨려서 이걸로 네 번째 기기에요.”
도리어 몇 번째 기기라고 알려주며 정직하게 나오자 지만은 외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림 이야기마냥 부끄러워하는 꼴을 기대했던 차였는데 예실이 너무 능숙하게 받아 넘겼다. 덕분에 재미가 싹 가시고야 말았다.
이렇게 기세가 오른 사람이 한 풀 꺾이면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지만이 그랬다. 그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잠시 온전히 놔두었던 아이스크림을 퍼먹었다.
구미가 당기지 않는 입맛과는 반대로 차가운 아이스크림 고체에 적당히 녹은 아이스크림이 분홍색을 그리며 묻어나 달콤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웃고 넘어갈 해프닝이지만 그 땐 정말 짜증났어요. 기계란 게 이렇게 약해 빠졌나, 같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녀는 실소를 터뜨렸다. 우수에 잠긴 눈동자가 그늘처럼 드리웠다.
잠겼던 목소리를 푸는 가 했더니 이윽고 한 스푼 아이스크림을 떴다.
입에 집어넣고는 날름 혀를 휘둘러 녹여 먹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황홀하리만큼 매력적이다. -
10 웨이로 (2555652E+6) 2018. 6. 8. 오후 8:29:34오늘은 못하겠네요. 내일 용량을 오늘 것까지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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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웨이로 (3296519E+4) 2018. 6. 9. 오후 8:09:15“별로 산 세월도 없는데 인생이 재밌어요. 아주 죽여줘요. 기기가 고장 난 시기가 말이죠. 슬프도록 가당찮은 타이밍에 망가지곤 했거든요.”
말을 끝맺자마자 그녀는 한 숟가락을 더 퍼서 입 안에 넣었다.
이번에는 이로 야금야금 씹어 삼키다시피 했다. 속이 타는 듯했다.
“첫 번째 기기는 갓 유치원을 나온 나이에 망가뜨렸어요. 항상 네모난 물건을 넣으면 뭔가 화면이 바뀌는 게 신기했죠. 어린 마음에 동화책을 넣으면 더 예쁜 장면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어요. 몇 번이고 강하게 쑤셔 넣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서 울었고요. 정작 울고 싶은 사람은 아버지이었을 텐데 말이에요. 닌텐도 64 기기의 칩이 휘어서 팩과 연동되지 않아 한동안 게임을 못하셨거든요. 그런데 화가 나셨을 텐데도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토닥여주신 기억이 어른거려요. 결국 달래준답시고 컵케이크까지 사주셨죠.”
예실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지만은 숙연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그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이후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그의 황량한 머릿속은 오만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두운 분위기에는 화제를 돌리는 게 중요하다. 지식의 반전이란 책에서는 우울증 치료 방법으로 트라우마의 근원을 잊고 쾌활하게 자신의 본분에 집중해서 정신없이 살아가는 게 좋은 치료법이라고 한다. 계속 떠올리기보다 억지로라도 잊고 다른 일을 하는 게 좋다는 거다. 정반대로 17살 나를 바꾼 한 권이란 책에서는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고 동조해주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론! 맙소사! 인생이 굴러가는 똥 같다고 이론도 서로 상충한다. 덕분에 내레이터는 옴짝달싹 입도 때지 못하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골고다 언덕에서 아버지를 잠시나마 원망했던 예수의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
“두 번째 기기는 초등학생 때 부셔버렸어요. 한창 학교에서 자석을 가지고 과학 공부를 하던 참이었죠. 철썩 달라붙는 철을 계속 봐보니 신기한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에게 자석을 달라고 졸라 결국 하나 얻어냈죠. 아버지가, ‘우리 사고뭉치 아가씨가 어떤 일을 만드실까?’ 라고 공공연하게 노심초사하셨죠. 아니나 다를까, 게임을 하다가 불현듯 궁금해진 거예요. 닌텐도 64의 칩도 철이잖아? 그럼 붙겠지. 그런 생각이 떠오른 거죠. 그래서 한 번 붙어봤어요. 기기가 들리는 것 같아서 계속 들어 올리려고 수십 차례고 붙였죠. 원체 꽂히면 될 때까지 해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계속 했던 거 같아요. 그랬더니 게임팩을 넣어도 인식하질 못하고 먹통이 되더군요.”
“자석이 전자기기를 망가뜨린다는 말은 자주 들어봤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군요. 이번에는 아버지도 혼을 좀 내셨겠습니다.”
“정말 엉망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이번에도 혼내지 않았어요. 뭔가 너털웃음을 터뜨리시더라고요. ‘우리 공주님을 어쩔까? 아직 동화책을 생각하고 계시면 안 될 텐데.’ 몇 번이고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그렇게 말한 게 다였어요.”
지만은 이 말을 듣자, 예실의 아버지가 얼마나 예실을 끔찍이 아꼈는지 가늠했다.
분명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여운 공주님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제는 조용히 있으면 안 된다고 판단한 지만은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
12 웨이로 (3296519E+4) 2018. 6. 9. 오후 8:10:21오늘 분량 도저히 무리 같습니다 ㅠㅠ
내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최근 슬럼프 제대로 왔네요. -
13 웨이로 (385828E+60) 2018. 6. 10. 오후 8:21:15나와 자기계발서와 쾌락 노예
살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래. 그냥 살고 있었다고. 딱히 생각 같은 거 없었다.
숨을 쉬고 있으니 뭔가 입에 쑤셔 넣었고 마시고는 뻘뻘 거리면서 다녔다.
읽다보면 알겠지만, 이젠 죽었다. 첫 줄을 읽어보라고. 과거형이잖아.
뭐, 되는 대로 살던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
“음, 뭔가 아쉬운데. 이건 아냐. 이건.”
“내 인생 내가 살았는데 뭐가 불만이시죠.”
“점수로 치면 C+ 같은 느낌이잖아. 노력을 하면 더 좋아질 수도 있었는데 별로라고.”
“귀찮으신 분이네요.”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선 뭐가 뭔지도 모르겠다. 신이라는 이상한 작자가 내 인생 리포트랍시고 세심하게 읽어 내려가고 있는 게 마음에 들 리가 없잖아.
분명 좀생이 같은 마인드가 발동한 게 틀림없다. 이러니까 내가 무신론자라고, 신이 있음 뭐해 거만하게 평가나 내리고 있으면서 해주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여자로 만들어 놨으면 좀 더 귀염성 있는 성격으로 말하면 좋을 텐데.”
“제가 그쪽 여성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여자 캐릭터가 아니라 서요.”
“그리고 뭐야, 이 식상한 죽음은. 실수로 인한 추락사라니.”
“아아, 죄송하네요. 재미없게 죽어버려서 말이죠.”
“너 정말 성의 없네.”
봐라, 하나같이 열 받게 만들려고 작정한 말만 내뱉고 뜻대로 안 되니까 푸념이나 하는 모습을.
이러니 신이란 게 있어도 좋을 리가 있어. 삐딱하게 말대답을 하고 냉소를 지어보이자, 놈은 아니 그건 흥미롭다는 듯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네 성격은 재밌네. 요모조모 살펴보면 외모도 괜찮고 놀려 먹기도 좋고.”
“남 참견하지 말고 게임이나 하시지 그래요. 아니면 여자 한 명 만들어서 연애라도 하시던가요.”
“호오, 연애라…좋아. 가만 보면 인기는 있었을 것 같은데 남자친구는 있었나?”
“다 귀찮아서 차버렸어요. 솔직히 바라지 않는 구애는 방해죠.”
굳이 쓸데없는 질문에 나불나불 입을 때서 말해주자, 그건 구역질나는 미소를 지었다.
회색 전두엽마냥 캄캄히 꺼져 있던 생각의 전구에 불이라도 들어온 듯, 웃는 그 미소가 발로 차버리고 싶을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여럿 피눈물 나게 만들었겠네. 그래, 다시 환생하게 해주지.”
“와아, 정말 감사해요.”
애써 호응을 해주자 그것은 손뼉을 쳤다. 동시에 빛이 환하게 쏟아지기 시작한다. 일은 하나보다. 천국이니 유토피아니 죄다 거짓말인 게 판정 났지만 이거와 같이 있는 것보단 낫겠지. 그런 생각으로 다시 태어난 세계에서 귀를 기울이자,
“축하합니다. 딸이시네요.”
“흐윽, 하아, 흑흑…”
고통과 슬픔으로 뒤범벅이 되어 울고 있는 익숙한 신음소리 사이로,
“잘했어, 여보. 소연이도 좋아할 거야.”
상냥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주할 거야, 신.
『15년 후』
부모님에게는 나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이 짙게 서려있었다. 하지만 다시 태어난 나에게는 어떻게든 그 슬픔을 숨기려고 야단이었다.
내 방은 물건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사진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유치원에 다녔을 때에 사진, 초등학교를 갓 입학한 사진, 중학교 때의 말괄량이 같은 사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사모 비슷한 모자를 쓰고 찍은 사진들이 죄다 없어졌다.
이 사실은 내가 5살이 되던 해에 깨달았다.
“분명 그 꿈도 구역질나는 그것의 장난이겠지.”
전생의 기억은 재빠르게 사라져 몸이 성장하면서 거의 잊혀갔었다. 평범한 아이처럼 허우적거리며 의문모를 의성어를 내뱉곤 했었다.
옹알거림을 비롯한 낮선 단어와 어투가 툭하면 튀어나오는 그런 아이였다. 그러나 갑작스레 꾼 꿈이 단편적으로 남아있던 전생의 기억을 다시 되살려 간직하게 만들었다.
“괴로워.”
모든 게 익숙해졌다. 전에는 궁금했던 행동과 말들이 전부 다 이해가 되었다.
“창고는 함부로 들어가면 안 돼.”
“아빠와 엄마는 특별한 일이 있어서 잠시 나갔다 올게.”
“왜 미역국이냐고? 3월 15일은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신이거든.”
모두 “왜?”, “어째서?”라고 답했던 것들. 그런 것들을 모두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죽도록 괴로웠다. 잊어버리라고, 없던 것처럼 취급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 모습을 자주 접할수록 생뚱맞게 엇나가기 시작했다.
“도와줄게.”
“싫어, 이 바보야.”
짜증났다. 다 알고 환생하게 만든 신에게도 짜증났고 쓸데없이 호의를 내세워서 손해를 보는 놈들에게도 짜증났다.
모든 게 스트레스였다. 그래서 그런지, 대책 없게도 성격이 마구 꼬여 남에게 스트레스를 푸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미안.”
“꺼져버려.”
안다. 주위 사람들은 이런 나를 못마땅해 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막 나갔다.
이러면 나를 갖고 논다는 발상을 한 신에게도 그것에게 이끌려 아무것도 못하는 죽도록 못난 내 자신에게도 합당한 벌이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전생에도 적었던 친구가 아예 없어졌다.
“안 돼지. 안 돼. 재미없게 나오기 없기.”
그래, 이런 말을 한 게 틀림없다. 특히 당신이 독후감으로 써오라는 자기계발서 책을 샀는데 그걸 읽고 써져 있는 원칙대로 사는 삶이 된다면 말이다. 욕지거리가 나오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 기분은 정말 최악이다. 덕분에 사람들의 부탁이라면 호구처럼 들어주고 일일이 상냥하게 받아주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무슨 심즈 게임마냥 명령이 떨어지듯 움직이는 사람이 된 거다. 하, 어이가 없어 완전히 미쳐버릴 것 같은 심정이다.
“요즘 보라는 착해진 것 같지 않아?”
“전부터 외모도 좋고 성적도 우수했잖아. 성격이 문제였지.”
“밝게 인사해주기도 하고 말을 해도 기분 좋게 하니까 인상이 훤해진 것 같긴 해.”
적당히 좋은 이미지를 얻고 있는 게 유일한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하긴 만사가 귀찮고 힘든 아침에도 밝은 목소리로 맞아주는 사람을 싫어할 이유는 없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주말은 잘 보냈어?”
“숙제 좀 보여줘! 티 안 나게 베껴 쓸 테니까.”
“혹시 오늘 시간 있어? 새로 생긴 디저트 카페가 괜찮던데.”
처음에는 익숙지 않아했던 아이들이 나중에는 꽤 이것저것 말해왔다.
개중에는 친구가 되자던 녀석도 있었다. 평소에 누구에게나 친하게 다가가는 놈이었다.
본심을 말할 수 있었다면 분명하게 선을 그었겠다. 귀찮은 일에 관련되기 싫다.
발 넓은 녀석은 일을 만들어내기 십상이다. 그럼 언제든지 잡일을 떠맡는 거다.
쓸데없이 진을 빼놓는 건 질색이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선화하고 어울려 다녔어. 옷가게만 아홉 군데를 다니던데, 입어만 본다더니 20만원이나 빌리지 뭐야. 그리고 숙제는 그대로 베끼면 안 돼. 저번에 해놓은 거 나란히 0점 처리 된 거 알지? 디저트 카페는 혹시 명원 베이커리 말하는 거야? 옷가게 들리면서 가봤는데 달콤 씁쓸한 디저트 있으니까 먹으러 가자.”
보다시피 결과가 이렇다. 뭔가 말만 하면 바로 네네, 하이하이, 하고 따라줘야 하는 거다.
만약 자기계발서 원칙 중에 무리한 부탁은 들어줄 수 있는 부탁으로 선회할 것이라는 사항마저 없었다면 온갖 악재를 뒤집어썼을 것이다. 20만원은 이미 허공에 날아간 기분이지만 말이다.
“걱정 마, 주기만 하면 제대로 된 솜씨로 해결할게!”
“방과 후에 만나! 기대하고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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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웨이로 (385828E+60) 2018. 6. 10. 오후 8:25:09결국 그 기간에 썼던 다른 단편으로 대체합니다.
모두 600단어! 용량은 채웠습니다. 이건 말그대로 단편이라 중간에 이걸 먼저 완결 짓는 걸로 노선을 정하겠습니다.
그녀의 인생에 스트라이크를 기대하셨던 분들에겐 죄송합니다. 되도록이면 병행해서 이걸 쓰는 동안 그인스를 좀 더 써보기로 하겠습니다.
또 죄송한게 하나 있다면 제가 내일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글을 못 올릴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튿날에 써서 올리기로 하겠습니다.
모두 좋은 일요일 저녁 보내시고 힘내서 월요일을 맞이하시길 바라겠습니다! -
15 웨이로 (6201857E+5) 2018. 6. 13. 오후 8:14:47“보라야~잘 지냈지?”
하지만 세상에는 밀쳐내도 때어내지 못하는 몇몇 별종들과 개념이 있기 마련이다.
낡고 닳아빠진 표현으로 인연이라고 부르고 필연으로 곡해되는 사람과의 관계가 그것이다. 도처에 친구가 널린 신나영이라는 여자애가 그랬다.
앞서 말했던 모진 말도 다 들었던 애지만 바보같이 착했다.
“그래그래, 좋은 주말이었어. 옷가게를 갔었는데…”
“신화 백화점에 간 거지? 거기 좋지! 특히 빛깔이라는 옷가게가 말이야…”
본래대로라면 짧게 대답해 주겠지만 이제 온종일 말을 이어가게 만드는 게 덜 귀찮은 일이란 걸 알게 되었다. 망할 놈의 자기계발서가 결국 요령을 피우게 만든 것이다.
옆에서 나영이 신나서 조잘조잘 떠들고 있으려니, 어느덧 바보 3인방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해양, 서미래, 박수리. 이 세 명은 아무 이야기나 끼어드는 하이에나 같은 애들이다.
꺄꺄, 후후 시끄러운 애들이기도 했다. 참 어리단 말이지.
덩달아 끼어든 애들이 나영과 더불어 온갖 이야기를 쏟아냈다.
“신화 백화점보단 비너스 백화점이 더 좋은 거 아니야?”
“옷보다는 향수지. 옷은 매번 유행을 타지만 향수는 오래가잖아.”
“그것보단 디저트야. 달달한 것보다도 매운 샤왈마. 먹어보면 스트레스가 한 번에 가셔!”
그야말로 삼천포로 이야기가 빠져나가는 아수라장이다.
나영이 목청을 돋웠다.
“어쨌든 하늘하늘한 드레스가 일품이라니까! 특히 여름 맞이 대바겐 세일이 금요일부터 시작이야! 비키니도 여러므로 들어온다고 하니 정말 두근두근 이벤트의 서막이지! 다들 같이 가서 보면 재밌을 거야. 그치, 보라야?”
“응?”
오늘의 ‘갑자기’스러운 사태는 지금 이 순간입니까?
아닌 밤중에 홍두께로 난데없는 부탁을 받았다.
그만둬! 섣부른 호의라면 거절하지 못하니까!
“즐거울 거야! 얇은 실 같은 비키니가 놀랄 만큼 화려한 색으로 재단되어 나오거든. 푸르고 맑은 바다와 빨갛고 열정적인 태양을 담은 도발적이고 대조적인 형태의 비키니! 그런 걸 입어보는 게 지루할 리는 없을 거야. 같이 가보자? 응?”
두렵게도 이목이 집중된다.
개중에는 대개 호기심어린 눈빛이지만 일부 게슴츠레한 시선도 있다.
분위기 상으로는 거절하기 힘들어도 온몸을 품평하는 눈빛이 신경 쓰였다.
그래서 좋은 말로 고사하려고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싶지만 이번 달은 좀 지출이 커. 모아놓은 돈도 별로 없고…”
“괜찮아! 보라의 색기 넘치는 가, 아니 나이스 바디를 표현하기 위해서 빌린 돈은 어떻게 해서든 돌려줄게.”
“잘됐네! 20만원이면 뭐라도 살 순 있어.
두렵게도 이목이 집중된다.
개중에는 대개 호기심어린 눈빛이지만 일부 게슴츠레한 시선도 있다.
분위기 상으로는 거절하기 힘들어도 온몸을 품평하는 눈빛이 신경 쓰였다.
그래서 좋은 말로 고사하려고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싶지만 이번 달은 좀 지출이 커. 모아놓은 돈도 별로 없고…”
“괜찮아! 보라의 색기 넘치는 가, 아니 나이스 바디를 표현하기 위해서 빌린 돈은 어떻게 해서든 돌려줄게.”
“잘됐네! 20만원이면 뭐라도 살 순 있어.”
“오오…”
순식간에 무드가 확 달아올랐다. 당사자의 기분이나 말은 존중해줬으면 하는데.
배려 따위는 멀리 사라지고 영락없이 가게 생겼다.
아무튼 난처하다. 귀가 없는 게 아니라 들어보면 “보라의 비키니 모습이라…” “글래머니까 볼만하겠는데…” 같은 말이 들렸다. 아니, 애들 중학생 아니었나. 내가 전생에 중학생이었을 때는, 아니다. 어떻게 보면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는 거 같다. 누가 그러던가, 인간의 욕망은 끝이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하여튼 내 비키니 모습을 보여준다니 안될 말씀이다. 어떻게든 제멋대로 ‘그렇다면 좋아.’ 라고 자기계발서 원칙대로 말할 것 같은 혀를 애써 곱씹으며 필사적으로 막아봤다. -
16 웨이로 (0080937E+5) 2018. 6. 17. 오후 7:03:10“죽도록 부끄러운데 나 그렇게 좋은 몸매도 아니고…”
“아냐. 나영이는 말이지, 평소에 보라를 보면서 군살 없는 배에 형태 좋아 보이는 가슴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어.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비키니 입은 모습 보고 싶어! 그러니까 같이 가주라!”
“사실 나도 보고 싶었어! 나도 같이 갈래!”
“어차피 향수도 사야했으니까 나도 따라 가볼래.”
“신화 백화점에는 내가 봐둔 진짜 매운 떡볶이가 있으니까 쇼핑 끝나고 그거 먹자!”
그러나 필사적인 저항도 무색하게 바보 3인방까지 끼어들고 말았다.
절로 조건이 완성되어 빼도 박도 못하게 “이렇게나 원한다면…” 이라고 말한 거다.
자기계발서의 사회관계 형성의 원칙, 다수의 사람들이 친목의 목적으로 다가오면 기꺼이 참여해라. 결국 그날 밤, 나는 그 부분을 몇 번이고 필사해서 태워버렸다. 이번 사후에는 절대로 한 대 패버리고 말 거야, 쓰레기 신.
“여기야, 보라야.”
“늦었어!” “거봐, 커피나 마시자니까.” “쓴 건 싫어. 매운 건 좋아도.”
평온했던 나날이 가고 마침내 폭풍이 몰아친다.
하필 학원을 다녀오고 버스를 아쉽게 놓쳐 약속 시간에 늦기도 했다.
이 정신없는 상황에 벌써부터 와글와글 소란스러워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제력이 발동해서 방실거리고 있는 얼굴이 원망스럽다.
“미안, 좀 늦었지?”
“우리도 온지 별로 안 됐어. 학원도 가야 했고.”
“거짓말, 10분 전부터 기다렸다며.” “난 금요일엔 학원 없는 데.” “마파두부 먹고 싶다.”
저마다 이심전심이다. 덕분에 약간 죄책감을 느꼈다.
시간 약속은 사수하는 게 매너인데.
나는 사죄의 의미로 고개를 슬쩍 숙이고 사과했다. 물론 맨입은 정이 없는 법이다.
근처 커피숍을 들려 각자 원하는 음료를 사주었다.
나영이는 한사코 마다했지만 이왕기사 좋은 이미지도 있잖은가.
마음이 편치 않다고 말하고 결국 사주었다. 내가 좋은 년이 아니라서 마음 편한 길을 택하니까.
“역시 캐러멜 마키아토지!” “아니거든 아이스 카페 라떼가 최고거든.” “딸기 요거트가 좋아.”
누가 뭐라 하든 어떤 메뉴를 고르든 속 편한 바보 3인방이다.
이게 다루기 편한데 은근히 다 잘해주려 하다 보니 사리는 게 많은 나영이가 의외로 버겁다.
“자자, 너무 미안하다는 표정 하지 말고 그냥 쭉 마셔.”
“그래, 고마워.”
이렇게 보니 약간 적극적으로 나설 때보다 귀여워진 거 같기도 하다.
약간 마음이 들떴다. 사냥을 나설 때의 사냥꾼은 사냥감이 도망치고 있을 때 가장 흥분한다. 뭐, 아닐 수도 있다. 손자병법 소설에서 본 문구니까 말이야. 엉겁결에 나는 사냥꾼이 된 느낌이었다. 물론 사냥감은 나영. 그래서 후후, 쾌활하게 웃었다. 장난 식으로 함박웃음을 지었다. 덕분에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나며 보조개가 만들어졌다.
“진귀한 장면이다!” “이렇게 웃는 거 처음 봤어.” “보기 좋아.”
바보 3인방이 평가한 내 생글생글한 얼굴은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묘하게 마음에 들어서 여러 가지로 콩트를 치며 놀았다. 덕분에 분위기가 한결 밝아졌다. 그런데 또 하나의 유명한 문구가 있다. 실수는 익숙해지기 시작할 시점에서 찾아온다는 말이다. 사람이 컨디션이 달아오르는 건 적응 면에서는 좋아보일지 몰라도 하나하나 일을 상대할 때의 마음가짐으로는 탈락이다. 이 때의 내가 그랬다. 잡담을 즐긴 후에는 한참 동안 카톡이나 하면서 커피숍을 나와 빛깔로 향했다. 그곳에서 내가 어떤 꼴을 당하리라는 것도 예상하지 못한 체 말이다.
“이야~이거 좋아 보인다.”
“음, 나 어때?”
“하하, 안 어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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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군대라서 그런지 참 쓰기 힘들어요;;
하지만 일주일 후에는 휴가! 그 때 가서는 못 채운 분량 다 채워 보도록 하겠습니다.
말도 없이 잠적해서 죄송합니다. 여러분. -
17 웨이로 (1256199E+5) 2018. 6. 19. 오후 8:17:08“잘 알겠습니다. 들어보니 맨 정신으로 했다고는 믿을 수가 없군요. 도박, 사기, 유산 분배 문제로 인한 법정 싸움까지. 악인 내지 이익에 눈이 먼 양아치들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요. 부모님들이 돌아가셨을 때, 심지어 돌아가시기 전에도 돈 이야기와 보험금을 놓고 겨루던 사람들. 제대로 된 애도의 빛도 표하지 않은 게 제 친척들이니까요.”
생각보다 과격한 그녀의 발언이다.
지만은 넌지시 재고의 여지를 주기로 마음먹었다.
“예실 아가씨, 친구로 대해달라고 하셨지만 주종관계로서 말하겠습니다. 분명 할아버님께서는 친척 분들이 재산만 밝혀 안타까워했을 겁니다. 하물며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고 친척들을 원망했었죠. 제가 패가망신하게 된 것, 도둑으로 탈바꿈 당한 처지를 버텨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다른 사람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더군요. 잠시 삼천포로 빠져 말을 잇겠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좋아하는 풍경을 말해드리죠. 저는 칠흑 같은 밤에 뾰족한 산둥아리, 캄캄한 밤하늘에 반달이 떠있는 조화로운 자연. 그 중에서도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반달을 가장 좋아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초승달도 보름달도 아닌 반달입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항상 제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실은 잠자코 듣고 있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모르는 바 없을 테다.
손이 차분히 포개져 편안한 분위기지만 그에 맞지 않게 입 꼬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내심 들어주려고 하지만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는 태도가 담겨져 있으리라.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칠푼이라 말하죠. 지금은 도처에 널려 있는 고기 집 때문인지 1인분 역할도 제대로 못한다고 말하기도 하고요. 당시에 저는 지금의 제가 어리석고 부족했다고 여겨지는 사람입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더라도 바꾸고 싶은 행동도 많습니다. 이에 따라, 과거에 제가 최선을 다하지 못한 책임이 오롯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현재 절절히 느끼고 있습니다.”
“지만 씨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비비 꼬아서 말하는 습성이 있군요.”
그리고 지만이 예상했던 답이 나왔다. 그녀는 잠시 입을 감싸고 하품을 했다.
“아쉬운 억양, 불만불평이 가득해 보이는 언사, 격정적인 어투. 이건 모두 지만 씨에게 동조해달라는 애정 표현이에요.”
그러나 뜻밖의 소식이다. 지만은 멍하니 들었다.
지난 세월이 그에겐 근래의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나누기에도 벅차게 느껴졌다.
사람의 표정, 목소리의 톤, 세심하게 움직이는 몸짓으로도 알아채기 쉽지 않았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아무리 본인의 돈으로 고용했다 해도 시시콜콜한 사생활까지 말하진 않아요. 제아무리 나라는 본인을 잘 아는 사람이 친근하게 다가오더라도 그 사람이 익숙지 않으면 말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요. 지만 씨, 이건 제가 당신을 그만큼 친구로서 생각하고 싶다는 것뿐이에요.”